탐구보고서
[주제탐구활동] 도시화로 발전한 시진과 농민들의 변화 -동아시아사
안녕하세요! 멘토 은결입니다 :)제가 2학년 동아시아사 과목에서 어떤 주제로 탐구활동을 했고,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주제를 정했고, 어떤 흐름으로 글을 썼는지 참고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아래 글은 여러분이 시진에 대해 탐구활동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점들을 서술해놓은 것입니다.주제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여러분의 생기부 평가에서 감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관련 분야: 경영, 무역, 사회관련단원: 3단원 동아시아사의 사회 변동과 문화교류-도시의 성장 주제: 시진의 전문화 과정과 시진을 통해 상업과 접촉하려는 강남 농민으로 인한 변화-명.청 시대 도시화 과정에서 크게 늘어난 시진 탐구하기 주제선정이유: 다른 도시와 달리 수로를 통해 유통망을 형성한 시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 중국 : 행정도시 ‘현성’과 상공업도시 ‘시진’의 병존 중국의 도시는 수도, 배도, 성도, 부성, 주성, 현성이라는 행정위계에 따른 상하관계로 편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국의 지방행정은 성-부주-현으로 구성되었고, 부성과 주성은 현성과 현청사가 소재하였고, 이들이 행정과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써 도시로 기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성은 송대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1,200곳에서 1,300곳이 존재했다. 행정중심기능을 갖는 전통적인 도시와 달리 송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시기에 농촌지역의 시진이 성장하여 중소도시로 기능하였다. 시진은 1개 현당 1.3개 정도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시진은 촌락-시집-시진(중소도시)-대도시로의 성장과정을 밟는다. 전국의 3분의 1에 달하는 시진은 강남지역인 강소와 절강지역에 집중되었다. 강남의 도시화는 대략 9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남송시대에는 그 첫 단계의 전성기에 이르렀고, 경제기능을 가진 중소도시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명 중기에 재차 발전기에 돌입하여 장기적 성장단계에 돌입하였다. 시진의 성장은 도시수공업과 상업발달을 배경으로 주면 농촌에서 많은 인구들이 이주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중국사에서 인구이동은 매우 중요한 사회현상이었다. 대대적인 인구이동은 명 중기에서 명 말기, 명 말에서 청 초 두 시기에 있었다. 인구이동은 성 내부 지역간에는 물론 성과 성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인구이동의 유형은 농촌지역에서 도시 및 수공업지역으로의 이동유형, 농촌지역에서 금산구로의 이동유형, 인구가 과밀한 선진경제지역에서 낙후한 농촌지역으로의 이동유형으로 크게 구분된다. 명 중기에서 말기에 걸쳐 계속된 인구이동은 ‘북에서 남으로’라는 이전시대의 대세와는 달리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이 기간 동안에 인구가 가장 집중된 지역은 섬서 남부, 사천 동북부, 하남 남서부, 호북 서북부로 이루어지는 사성교계지역이었고, 그 다음이 강서 남부, 복건 북부, 광동 동북부, 호남 동남부 등으로 이루어지는 사성교계지역이었다. 성단위로 보면 호광지역에 인구가 집중적으로 유입되었고, 그 다음이 사천, 북직예, 산동, 하남 지방이었다. 명 말 청초에 걸쳐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있었다. 사천지역은 명 말 장헌충의 난 때문에 인구가 격감되었다. 청 초기 사천의 인구비중은 전체의 1%에 불과 했지만, 1761년(건륭 26)에는 전체 인구의 10%로 격증했다. 이와 같은 인구이동으로 인해 명대 양자강 중류 일대의 토지가 급속히 개발되었으며, 토지개발의 결과 중국의 경제중심지가 분화되었다. 특히 송대에서 명 초까지는 양자강 하류의 강소성, 절강성 지역이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명 중기에서 강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강소성의 소주, 송강, 상주, 태창의 4부주와 절강성의 가흥, 호주, 항주의 3부 등 7개의 부주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동으로는 황해, 서로는 산구사이에 위치하는데 모두가 태호 주변지역이어서 대소의 하류가 관류하고, 항주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경항 대운하의 연변에 위치한 풍요로운 평원이며 수향택국이었다. 도시화는 이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강남지역은 명초에 홍무제가 뽕나무, 마, 목면의 재배를 권장하고 조세의 일부를 그 생산물로 납부하게 하면서 경제구조가 변모하였다. 이 지역에는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직업과 견직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면직업에 견직업의 방직기술이 결합되면서 고급면포 생산이 이루어졌다. 미곡을 재배하던 농경지가 뽕나무나 목면의 재배지로 변모하였고, 견직업, 면직업 분야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였다.강남지역에는 소주, 남경, 항주 같은 대도시만이 아니라 시진이라는 다수의 중소도시들이 밀집하였다. 명, 청시대 발달한 도시 중 시는 대개 100~300호 정도로 보편적이었고, 500~1,000호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1,000~2,000호는 극소수였다. 진은 대개 1천호 이상의 중급도시를 지칭했는데, 인구는 2천호에서 3천호정도였다. 명청시대 강남지방의 도시화는 이미 존재하던 대도시는 안정되어 성장세가 둔화된 반면, 시진은 수적인 증가와 함께 시진내외의 호구수도 증가함으로써 도시규모의 확대와 번영이라는 양면적 발전이 이루어졌다.소주부 오강현 성택진의 경우 명초에는 50~60가구에 불과한 촌락이었으나 15세기 중엽부터 상인과 수공업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에는 100여 호로 증가했고, 17세기 전반에는 1천호, 강희연간(1662~1772)에는 1만여호로 증가한 결과, 1740년(건륭 5)에는 진으로 승격하였다. 소주부 진택진의 경우 14세기 중엽에는 수십호의 촌락이었으나 15세기 중엽에는 300~400호, 16세기 중엽에는 2천호~3천호로 증가했다.명말 청초를 기준으로 하여 1만호 이상의 초대형 진은 소주부에 성택진 등 6개, 송강부 2개, 호주부 2개, 가흥부 3개, 항주부 1개, 가흥과 호주부 사이에 있었던 호청진 등 모두 15개였다. 거민이 수천호에서 만호에 이르는 중형 진도 10개였다. 이처럼 명청시기 강남지역의 시진은 매우 빠르게 늘었다. 소주부의 시진은 1550년 이전에 102개였다가 18세기 중엽에는 157개로, 19세기에는 264개로 늘었다. 송강부는 1550년 이전에 59개였다가 18세기 중엽에는 167개로, 19세기에는 369개로 급속하게 늘었다.이처럼 늘어난 강남의 시진들은 업종별로 전문화된 자신의 산업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비단생산의 중심은 남심진, 성택진, 면포생산의 중심은 남상진, 나점진, 미곡유통의 중심지는 풍교진과 평망진 등이 대표적 시진이었다. 시진은 교통이 중요하므로, 강남지역의 경우에는 수로의 연변이나 교차지점에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특정 행정단위 내에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현과 현의 경계에 위치하기도 하고 2개의 성에 걸쳐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풍경진의 북측은 강소성, 남측은 절강성에 속했다. 이들 시진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탐구주제를 정한다면 경영, 무역, 사회, 국제에 관심있는 학생들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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