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학교 다닐 때 작성했던 한강 작가님의 저서 ‘소년이 온다‘의 독후감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고통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 ― 『소년이 온다』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함께 읽으며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 서사가 주는 비극성보다도 그 서사 너머에 깔린 깊은 침묵의 그림자에 더 오래 붙들렸다. 열다섯 살 동호가 도청에 깔려 있는 주검을 수습하며 친구 정대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은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지만 한강의 문장은 그 상황을 다시 날것의 경험으로 되돌린다. 재현된 폭력임에도 ‘다시 겪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우리가 가까운 자리에 폭력을 남겨 둔 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몸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위로 덮은 천에서도 핏물이 번져 나왔다”(p.18)라는 한 문장은 과거의 장면이 아니라 현재형의 기록처럼 보인다.이 소설이 더 강하게 드러내는 폭력은 그날의 총칼보다 실제로 더 오랫동안 사람들을 짓눌렀던 ‘침묵의 폭력’이다. 동호가 죽고 난 뒤에도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겪으며 살아가지만, 아무도 그 상처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경찰의 감시, 사회적 낙인, 그리고 무엇보다 말해도 아무 일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이 그들의 입을 무겁게 만들었다. 편집자 정미가 “나는 그날 아침의 나를 부끄러워한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p.156)고 회상하는 장면은 개인적인 고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시대가 개인에게 떠넘긴 거대한 책임과 죄책감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여기서 나는 김승섭 작가의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떠올렸다. 그는 “사람의 몸은 사회를 기억한다”고 말하며, 한 개인의 고통이나 질병, 죄책감이 사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밝힌다. 참사 생존 학생들이 평생 잠에서 깨는 소리를 두려워하는 이유, 군대에서 폭력을 경험한 청년들의 우울증이 제대한 뒤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이유,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명권이 쉽게 침해되는 이유는 한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력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아픔’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통을 개인에게 부담하게 하는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말한다.이 관점에서 본다면 『소년이 온다』 속 인물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사실 그들이 짊어져서는 안 되는 책임이다. 정미가 느낀 부끄러움은 그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그녀가 목격한 폭력조차 말할 수 없도록 만든 사회적 억압이 만든 감정이다. 과거의 광주는 개인에게 폭력의 잔해를 남긴 뒤, 그 잔해의 책임 역시 개인에게 전가했다. 김승섭이 말하는 것처럼 고통이 말해지지 않을 때, 그 고통은 개인의 자책으로 변형된다.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은 침묵과 죄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년이 온다』 속 생존자들이 오랜 세월을 우울과 두통,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한 트라우마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 때문이다.한강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문학적 장치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에서 죽은 동호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초자연적 표현이 아니다. 죽은 자가 살아남은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는 방식은, 역사에서 입을 닫고 떠난 것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았다. 너희가 내 곁을 떠났을 뿐이다”(p.75)라는 문장은 죽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던 사회가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잊힌 것은 동호가 아니라 그를 잊은 사람들이다.이때 김승섭이 강조하는 ‘듣는 사회’, ‘듣는 공동체’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사회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도덕적 분노나 추상적 기념이 아니라 사람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구조라고 말한다. 증언이 보복으로 돌아오지 않는 제도, 트라우마를 사회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시스템, 피해자의 고통을 공동체의 문제로 전환하는 정책들. 이것들이 진정 아픔을 줄이는 첫걸음이며 말을 잃은 공동체를 말하게 만드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광주의 고통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폭력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폭력 이후의 사회가 기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회는 상처를 더 깊게 만든다.『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김승섭은 한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손가락을 잃고도 “내가 조심했어야지”라고 말하던 장면을 소개한다. 그는 그 말 속에 ‘사회가 해야 할 책임을 개인이 스스로 감당하게 만든 폭력성’이 숨어 있다고 분석한다. 이 구조는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작동한 것과 동일하다. 국가 폭력의 피해를 입고도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무모했나”라고 자책하게 만든 사회는 폭력을 은폐하고 고통을 개인의 내부로 눌러 넣는다. 문학과 사회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결국 두 책은 고통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혼자서 감당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폭력이라고 똑같이 말한다.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지만, 그들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말할 수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정미는 결국 자신의 기억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본 것, 자신이 침묵한 시간, 자신이 부끄러웠던 순간까지 모두 포함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그 장면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 결심은 개인의 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써야 한다. 아무도 쓰지 않는다면, 그날이 사라질 것 같았다”(p.182)는 절박함에서 출발한다. 기록은 죄책감의 회피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시작으로 여겨져야 한다.김승섭 역시 책에서 말한다.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이 겪는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너희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라고. 고통을 말할 수 있게 만드는 환경은 개인을 치유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이 관점으로 돌아보면 정미의 글쓰기는 단지 한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가 해야 했던 말을 개인이 먼저 시작한 것이다. 문학의 증언이 사회적 실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결국 『소년이 온다』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서로를 해석하는 책이다. 한강이 폭력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면, 김승섭은 그 폭력을 사회적 언어로 번역한다. 한 작품이 고통을 드러내고, 다른 작품이 그 고통을 분석하며, 두 작품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고통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아픔을 기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개인의 탓으로 고통을 돌리는 편리한 구조 속에 머물러 있는가.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소중히 간직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라, 현재를 다시 묻는 윤리적 행위이다. 동호가 남긴 목소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할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고통의 표상이다. 『소년이 온다』는 이를 문학으로 복원하고,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그 언어를 사회의 구조 속에서 읽어내라고 말한다. 두 책이 함께 건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슬픔을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슬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이다.기억은 책임이고, 책임은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그 변화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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